나성범 2021년 메이저리그 도전
NC 다이노스 No.47
나성범(羅成範 / Na Sung-Bum)
생년월일
1989년 10월 3일 (31세)
출신지
광주광역시 남구
신체
183cm, 110kg[1]
학력
광주대성초 - 진흥중 - 진흥고 - 연세대[2]
포지션
투수 → 외야수, 지명타자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2008년 2차 4라운드 전체 32번 (LG
2012년 2라운드 전체 10번 NC
소속팀
NC 다이노스 (2012~)
등장곡
드렁큰 타이거 - Monster
응원가
어린 시절
광주진흥고 시절에는 4번 타자로 활약했으며 투수 이전에 외야수로서도 자주 출장했다. 3학년이던 2007년 봉황대기에서 타율 5할을 기록하는 등 5개 전국대회 통산 타율 0.353의 강타자 겸 투수였다. 3학년 투수 성적은 12경기 2승 2패 30.2이닝 29K ERA 3.19.
2008년 드래프트에서 2차 4순위로 LG 트윈스에 지명되었으나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다. LG가 싫어서 대학에 진학한 것이 아니라, 진학이 결정된 선수를 LG가 숫자 채우기 식으로 지명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당시 드래프트에서 LG 4순위부터는 모두 대학 진학이 결정된 선수를 지명한 것.
대학 시절
연고전에서는 4년간 4경기 34 2/3이닝을 던져 2승 1패(1무)를 거두어 연세대의 노예로 이름을 날렸다.
1학년 때부터 연세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2008 연고전에서부터 선발 등판, 3회초 대거 7득점한 타선의 지원에 힘입어 9이닝 완투 2자책점의 훌륭한 성적으로 9:2의 완승을 거둔다. 다음해 2009 연고전에서는 8회까지 3점만 내주는 호투를 펼쳤으나, 당시 고려대의 에이스였던 신정락(현 LG 트윈스 투수)도 호투하며 마지막까지 박빙으로 경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당시 양승호 고려대 감독의 대타 작전으로 9회초 무사에 연속 3루타와 단타를 맞고 4:5로 역전당해 완투패를 기록했다.[8]
2010 연고전에서는 경기 초반 만루에서 싹쓸이 2루타를 맞고 3실점하여 연세대의 패색이 짙어졌으나, 타선이 간신히 동점까지 쥐어짜내면서 간신히 3:3으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7회 이후에는 지친 나머지 제구력이 시망이라 사사구를 남발하기도 했으나, 9회말 2사 만루에서 풀카운트 삼진으로 대타 김경도를 잡아내면서 4:4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했다.[9] 6회까지 0:3으로 지고 있던 연세대 학생들은 이 야구 만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에 환호했으며, 고대 학생들은 말도 안 되는 결과에 아연실색하며 자교의 물타선을 욕했다.
2011 연고전에서는 0:1로 지고 있던 2회 2사 1, 2루의 위기 상황에서 계투로 등판, 경기 종료까지 7 2/3이닝 동안 140구 이상 던지고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3:1로 승리를 챙겨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경기 말부터 잠실구장 3루 측(고려대 응원석)에서는 "또 쟤 나왔냐?" "저건 사기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상으로 인해 선발출전이 어려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투구 내용은 그다지 좋지 못해 빈번히 위기상황을 맞이했지만, 직구의 구위를 바탕으로 꾸역꾸역 이닝을 먹었다. 그래서 고대생들은 나성범이 아니라 자기 팀 빠따 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흥미롭게도 이 날 경기에서 2회부터 9회까지 마운드를 지켰던 나성범을 상대했던 고려대학교 투수는 3명으로, 두산베어스 1차지명 윤명준, SK와이번스 1차지명 문승원, 그리고 SK와이번스 임치영이었다. 대학 최정상 선발진들이 계투로 나오는 중요한 경기에서 비자책으로 승리를 거둔 나성범은 타자전향설이 불거진 시점에서 '투수로서의 가치하락' 이라는 의혹을 깨끗이 씻어냈다.
여담으로 2011 연고전 방송제에서 고려대 방송국에서는 성동일의 현대스위스 광고를 더빙하여 "나성범은 아직도 직구밖에 모른다~" 라는 디스를 시전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대학교를 디스하면 디스했지 특정선수를 디스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으며, 그 정도로 나성범이 연고전 야구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고려대학교 타자들이 나성범의 직구를 공략하기 위해 합숙훈련 과정에서 피칭머신의 속도를 160에 맞춰놓고 연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4년간 나성범의 역대 연고전 기록을 정리해 보면
2008 9이닝 2실점 2자책 완투승
2009 9이닝 5실점 4자책 완투패
2010 9이닝 4실점 3자책 완투무승부
2011 7 2/3이닝 무실점 무자책 승
총 4경기 34 2/3이닝 ERA 2.34 2승 1패
나성범의 연고전 활약은 연세대와 고려대의 당시 전력차를 생각하면 더욱 빛을 발한다. 연세대학교에 나성범이 재학중이던 2008 ~ 2011년에 연세대학교에서 배출한 인지도 있는 프로선수는 그의 친형인 삼성 라이온즈 나성용, KIA 타이거즈 고영창,유민상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고려대학교 야구부는 당시 대학리그 최강으로 꼽혔으며, 나성범과 동기급인 선발 트로이카 임치영, 윤명준, 문승원과 나성범이 신입생이던 시절 30.1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던 대학리그 최고의 투수였던 신정락, 그리고 타선에는 김재율, 홍재호, 박세혁, 황정립, 김상호, 문상철 등 당시 대학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지명타자 전향
2012 신인드래프트에서 신생팀 NC 다이노스에 2라운드 전체 10순위로 입단을 하게 되었다.
대졸임을 감안해도 대어임이 분명했지만 1라운드 지명이 안 된 것은 드래프트 규정 때문으로, 야구 규약 108조 2항에 따르면 고등학교때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았음에도 대학 진학을 한 경우 1라운드에서는 지명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나성범이 고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1차지명이 있었던 때라 규정이 '1차지명 불가'였는데 전면 드래프트로 바뀐 후 문구만 수정해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규약을 확실히 개정할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크게 이슈화되지는 못했고 KBO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NC 입장에서는 넝쿨째 굴러온 호박인 셈.
사실 이 규정 때문에 원래 나성범은 2010 우승팀에 주는 포상이다라는 얘기가 야구 팬들 사이에 있었고, 덕분에 2010 시즌 우승팀인 SK 와이번스 팬들이 상당히 설렜지만 NC가 창단되면서 2라운드 우선 지명권이 NC에게 돌아가게 됨에 따라 망했어요.
지명은 분명히 투수로 받았지만 2011년 가을캠프에서 타자 전향을 선언했다. 김경문 감독의 권유로 전향했다고 하며[15][16] 김경문 감독도 타자로서의 재능에 중점을 두고 지명했다고 밝혔다. 물론 타자로서의 재능을 더 높게 본 것도 있겠지만 부상 때문에 전성기 시절의 공을 못 던지게 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성범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야수로도 자주 뛰었다. 대학리그에서도 역시 타자로 자주 출전해 스카우트들에게 이미 컨택 능력과 장타력을 입증했기 때문에 타자 전향에 큰 무리는 없었다. NC는 나성범을 신생팀의 창단 프랜차이즈이자 간판 타자로 키우기 위해 작정하고 전략적으로 지명했고, 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2년 퓨처스리그 개막 이후 전반기 동안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였고, 훤칠한 외모에 재능까지 합쳐져 이미 NC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조짐을 보였다. 후반기 들어서는 상대팀 투수들의 집중적인 견제로 인해 약간 페이스가 쳐졌다.
이는 특히 몸에 맞는 볼이 무려 33개일 정도로 자주 나온 것이 컸다.[18][19] 1군 기준으로 봐도 박석민이 27개로 1위, 최정이 21개인데 비록 퓨처스리그 기록이라고 하지만 저 정도의 사구갯수는 굉장히 이례적으로 많은 편. 특히 장원준은 나성범이 홈런친 뒤 다음 타석에서 대놓고 빈볼을 던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20] 이 당시 일부 롯데팬들은 오히려 장원준의 행위를 옹호하는 추태를 벌이기도 했다.[21]
결국 시즌 초중반의 임팩트 있던 모습에 비해서는 다소 평범한 성적인 0.303, 홈런 16, 67타점, 29도루로 시즌을 마쳤다. 그래도 팀 내 유일한 퓨처스리그 3할 타자로 활약했고, NC가 밀어주는 간판 타자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할수 있다.
2.1.3. 2013 시즌
2012 시즌
2012년 퓨처스리그 개막 이후 전반기 동안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였고, 훤칠한 외모에 재능까지 합쳐져 이미 NC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조짐을 보였다. 후반기 들어서는 상대팀 투수들의 집중적인 견제로 인해 약간 페이스가 쳐졌다.
이는 특히 몸에 맞는 볼이 무려 33개일 정도로 자주 나온 것이 컸다.[18][19] 1군 기준으로 봐도 박석민이 27개로 1위, 최정이 21개인데 비록 퓨처스리그 기록이라고 하지만 저 정도의 사구갯수는 굉장히 이례적으로 많은 편. 특히 장원준은 나성범이 홈런친 뒤 다음 타석에서 대놓고 빈볼을 던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20] 이 당시 일부 롯데팬들은 오히려 장원준의 행위를 옹호하는 추태를 벌이기도 했다.[21]
2013시즌
결국 시즌 초중반의 임팩트 있던 모습에 비해서는 다소 평범한 성적인 0.303, 홈런 16, 67타점, 29도루로 시즌을 마쳤다. 그래도 팀 내 유일한 퓨처스리그 3할 타자로 활약했고, NC가 밀어주는 간판 타자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할수 있다.
타자 전향 2년, 1군 진입 1년차 만에 프로에서 의미있는 성적을 내며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04경기 404타수 98안타 14홈런 64타점 타출장 .243/.319/.416. 비록 팀 동료 이재학에게 신인왕을 내주긴 했으나 리그에서 주목 받은 루키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한 성공적인 시즌이 되었다.
2014시즌
기대에 비해 조금은 아쉬웠던 지난 시즌을 뒤로하고 완벽히 자신의 가능성을 터뜨리며 1군 2년차 만에 3할 30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에 승선하여 금메달까지 따내면서 병역 문제까지 해결. 시즌 최종 기록은 123경기 477타수 157안타 30홈런 101타점 타출장 .329/.400/.597. 시즌 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는 데뷔 첫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2015시즌
이 시즌부터는 강점인 어깨를 살리고 공격력 극대화를 위해 포지션을 우익수로 변경했다. 비율 스탯 자체는 지난 시즌보다 하락했으나 144경기 전 경기 출전과 함께 28개의 홈런과 23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최종 성적은 144경기 564타수 184안타 28홈런 23도루 135타점 타출장 .326/.373/.553. 2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까지 얻어냈다.
한편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는 6:4로 뒤지고 있던 9회초 2사 상황에서 투수로 등판해 이닝을 끝낸 이후 9회말 2사에서는 타자로 나와 뜬공으로 물러나며 2015년 NC 다이노스의 마지막 투수이자 마지막 타자가 되었다.
2016시즌
2년 연속 전 경기 출전과 함께 KBO 리그 역대 7번째 3년 연속 100타점을 달성했다. 팀은 나테이박 클린업 콰르텟을 구축하며 팀과 본인 모두 역대급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후반기에는 김태군이 부럽지 않은 처참한 타격성적을 기록하며 타고투저의 리그 상황에도 3할 턱걸이 타율, OPS 0.885로 시즌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2017시즌
수비 도중 당한 손목 부상으로 인해 예년보다 20경기 정도를 결장했지만 비율 스탯에서만큼은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특히 2014 시즌 OPS 0.998을 기록한 이후 계속해서 떨어지기만 하던 OPS였으나 드디어 1.000을 찍는데 성공했다.[22]
이와 함께 포스트시즌에서도 드디어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2014~2016년 포스트시즌 통산 기록이 18경기 타율 .224에 1홈런 3타점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이번 시즌에는 10경기에 나서 4할의 타율에 4홈런 11타점을 기록했다. 2017년 이전의 포스트시즌 WAR은 투수로 0.1이닝 던졌을 때보다 낮았다는 점에서 얼마나 포스트시즌에서 부진했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
2018시즌
주전 선수들의 잦은 이탈과 외국인 선수들의 부진으로 인해 팀은 창단 이후 최초로 꼴찌를 기록했으나 전 경기 출전 및 수비 최다 이닝을 기록하며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누적과 비율 스탯 모두 만족스러운 성적은 아니었고, 지난 시즌에 비해 무려 0.1이나 떨어진 .899의 OPS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홈런 역시 23개에 머물렀고 91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100타점에도 실패.
2019시즌
5월 초까지 23경기 4홈런 14타점 타출장 .366/.433/.645 OPS 1.089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거두고 있었으나 5월 3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슬라이딩 도중 무릎이 꺾이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통산 1,000안타를 달성한 직후 당한 부상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상황. 결국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및 연골판 파열이라는 진단을 받으며 커리어 최악의 부상이 되어버렸고, 시즌 아웃은 물론이고 복귀 이후의 퍼포먼스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2020시즌
모든 이들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부상복귀 첫 시즌, 6년 만에 3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는 등 NC의 창단 멤버로서 창단 첫 정규시즌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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